1부 몸 살림 마음 살림


『우리 몸 우리 자신』 1부는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데 필요한 기초 정보를 제공한다. 약물 치료와 수술, 위기 대처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의료는 아플 때나 도움이 되지, 건강관리에 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건강을 증진시키거나 악화시키는 요인은 대부분 우리의 생활환경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질과 들이마시는 공기, 건강관리와 운동 방식, 휴식 양,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 강도, 술과 담배, 기타 약물의 사용량, 직업 환경의 안정성 여부, 성폭력과 그 위협이 존재하는지의 여부 등이 그 예다. 이중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우리가 힘을 합해 일상생활의 조건들을 변화시켜야 출구가 보인다. 우리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고용주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더 값싸고 질 좋은 식품을 먹을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고, 가까운 화학 공장에서 뿜어내는 공해에 항의하고, 가정에서 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해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연대를 형성해야 한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들, 특히 재정적 자원은 일상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다. 사회가 불공정할 때, 특정한 사람들은 건강관리 차원에서도 남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확보하게 된다. 여성운동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모든 사람이 건강과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건강을 유지하고, 자신을 치유하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건강지상주의


건강 지상주의는 간단히 말해 건강관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특히 많은 사람들이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혼자서는 건강을 결정하는 의료 체계나 오염된 물, 식품에 들어 있는 독소, 우리가 마시고 있는 공기 같은 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껴서, 식사, 운동 같은 개인 차원의 노력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건강 또는 ‘건강 생활’만을 도달 목표로(‘건전’ 사회의 척도로) 강조하다 보면 사회 정의와 평화라는 더 큰 목표에서 멀어질 수 있다.        

   질병의 예방은 중요하다. 그러나 기존 의학은 개인 차원의 예방만을 너무 그럴 듯하게 강조하고 있어, 그 가운데 과장된 설명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예방이란 말이 널리 퍼지면서 우리는 점점 더 ‘건강과 병’이라는 의학적 모델에 따라 삶을 규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고유한 권리에 속하는 운동, 식생활, 명상, 신선한 공기, 춤 등 모든 즐거움을 잠재적 ‘건강’이나 ‘건강하지 않음’의 기준으로 여긴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의료화된다.

   건강관리는 또한 도덕적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개인들은 아플 때 죄의식을 느낀다. 사람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이들에 대해 고개를 저으며 실망스러워한다. 이는 건강 습관에 대한 사회 ․ 경제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질병의 복합성 모두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결과를 낳는다. 개인의 습관 같은 기준으로만 판단하려는 경향은 건강 문제를 단순화한다. “그 여자는 담배를 끊고, 운동을 좀 더 많이 하고, 설탕을 줄여야 해.”  이런 것들이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 해도 융통성 없는 건강 지상주의는 적절치 않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도 도움이 안 된다.

 


스트레스


   1부 대부분의 장에서는 스트레스를 건강을 해치는 중요한 요소로 본다.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에게도 위험에 처했을 때 맞서 싸우거나 피하도록 되어 있는 고유한 ‘스트레스 경보’ 시스템이 있다. 인간의 삶이 좀 더 단순했던 시기에는 스트레스에 맞서 싸우거나 피하는 것이 가능했고 적절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위험의 형태가 분명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즉각 대응하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이고 만성적이며 모호한 스트레스를 자주 경험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거나 피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른다. 여러 해 동안 몸이 스트레스에 반응하지 못하면 면역 체계를 해쳐 갖가지 질병이 유발될 수도 있다는 게 통설이다.

   외모에 대한 억압은 여성에게 크게 스트레스를 준다. ‘어떻게 보일까’에 관한 비현실적인 고정관념은 더러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외모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만든다. 미국에서는 지속적인 인종 차별주의 아래서 살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결국 건강 문제를 일으켰고, 학자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 여성들은 거리, 직장, 가정 등 성폭력의 위협이 도사리는 환경에 살면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여성 가장이나 세대주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여성들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계속 증가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을 해야 한다. 이는 사회 복지의 감축과 결합해 여성에게 커다란 스트레스의 요인이 된다. 식품 또한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다. 나와 우리 가족은 영양 공급을 충분히 받고 있는지? 맛있고 건강에 좋은 무공해 식품들을 먹고 있는지? 식생활은 스트레스 대처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한편 먹는 문제로 고통을 겪는 여성들과 소녀들이 있는데, 이중에는 거식증이나 폭식증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도 있다. 어떤 이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 · 담배 · 약물에 의존하지만, 이런 해결책은 상황을 더 악화하기 일쑤다.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잘 먹는 것, 운동, 명상, 총체적인 건강관리, 심리 치료, 심리적 정서적 건강을 돌보는 대안적 치유법이 있으며, 또 발 마사지, 온욕, 그리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등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가끔 불평도 하고, 친구들에게 격려도 부탁하고, 자주 웃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부정적이거나 과도한 스트레스 요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변화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이런 것들은 우리 힘만 가지고 쉽게 이룰 수 있거나 늘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음 장들에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함께 노력해서 변화시켜야 할 사회적인 요소들을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변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우리 자신의 건강과 복지의 중요한 자원인 에너지와 희망을 제공한다.

 

 

2부 관계와 성


애정 관계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섹스가 포함된 애정 관계는 활력, 편안함, 자유로움뿐 아니라 격정과 혼돈, 좌절을 안겨 주기도 한다. 관계는 권력과 취약함, 헌신과 위험이라는 문제를 일으킨다. 성적 관계는 어찌 보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오랜 관계가 파경을 맞거나, 사랑의 약속이 깨지거나, 연인이 죽기도 하고, 서로 좋았던 관계가 학대하는 관계로 변질될 수도 있다. 우리 대부분은 친밀함을 원하고 필요로 하며 대개는 상처에서 회복되어 또 다른 관계를 시도한다.

   2부에서는 우리의 성적인 관계 맺기를 아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우리는 성적인 관계에서 무엇을 얻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남성과 맺는 성적 관계는 무엇이 특별한가? 또 여성과 맺는 관계는 어떤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성을 더 잘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까? 다른 이들과 우리 자신을 자유로이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나이 ․ 장애 ․ 인종 ․ 성역할 ․ 성적 지향 ․ 계급에 대한 사회 구조와 태도들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다음에 이어질 프롤로그는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 둘은 분리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면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 타인과 맺는 관계,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들과 맺는 관계나 사랑하는 여자들과 맺는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적 지향은 선택의 문제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좁은 의미의 성적 지향의 개념을 넘어서고 있으며, 일시적이든 평생이든 성과 로맨스의 상대를 정하는 데에 예전보다 자유롭다. 이성애를 선택한 여성들 중에는 그 선택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더 자유로울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동성애 관계를 갖는 여성들이 점차 자신을 드러내고 있고, 십 년 이상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여성이 남성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기도 한다. 양성애자 여성들은 양성애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동성애와 이성애자 간의 연대에 합류하거나,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하는 꼬리표가 붙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당당하게 택하기도 한다. 우리들 중에는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는 포괄적인 용어인 ‘퀴어’ 나 ‘이반’1으로 자신을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성적 지향의 유동성은 때로는 헷갈림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미래의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성애가 유일한 규범이라 믿는 정계나 종교계의 보수적 인사들의 지속적인 반발과, 양성애를 혐오하는 일부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성적 지향의 유동성은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도록 해주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더 온전히 사랑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지속되는 듯하다.

   30여 년 전에, 앨프레드 킨제이의 연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집에서나 학교에서 사람들은, 레즈비언이나 게이 또는 양성애자에 대해 침묵하거나 아니면 가시 돋친 농담을 일삼았다. 우리 문화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동성애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도록 가르친다. 이런 동성애 혐오증은 우리가 이성애자이든 레즈비언이든 양성애자이든,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사람들이 우리를 레즈비언으로 생각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여성적’이지 않은 모습(강한 자기주장, 근육 만들기, 몸에 난 털, 저음)을 거부하게 된다. 동성애 혐오증 때문에 여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친구나 식구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로 인해 중요한 관계를 깨뜨리게 되기도 한다. 또 자연스러운 끌림을 거부하게 하고,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성적 파트너를 고르지 못하게 한다. 또 우리가 레즈비언이나 양성애 여성들과 우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우리 여성들을 이간질하는 것이다.

   우리가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라면, 동성애 혐오 때문에 일어나는 안티레즈비언의 폭력과 차별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성애가 유일한 정상적인 성적 지향이라는 전제가 제도화되어, 동성애 차별주의는 우리의 법적 ․ 종교적 ․ 사회적 권리를 박탈한다. 결혼할 수도 없고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도 없고 파트너의 건강 보험 혜택을 받을 수도 없다. 직업과 주거에서 차별을 받으며, 대중 매체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다. 동성애 혐오와 동성애 차별주의는 ‘전통적’ 가족을 보존하고 다른 대안을 억누르려는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용한 도구다.

   여성이 레즈비언으로 살기 위해 치르는 대가를 보면, 우리 대다수에게 이성애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성애나 동성애, 양성애, 독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그렇다 해도 많은 이들이 이성애를 선택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회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좇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진정성, 자발적 의지, 우정이 있다면 우리는 동성애 혐오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른다섯에 레즈비언이 된 뒤에도 내 안에 아주 심한 동성애 공포증이 있음을 깨달았어요. 때로 사랑하는 여자와 섹스를 한 후 잠에서 깨어날 때, 우리가 나눈 그 멋진 섹스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하곤 했지요. 또는 사람들이 있는 데서 레즈비언임이 분명해 보이는 여자들을 봤을 때 당황하곤 했어요. 그러나 나는 서서히 레즈비언들과 레즈비언주의에 더욱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죠.

   우리 가운데 남성들과 상호적이고 만족스러운 양성 평등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 투쟁하는 이성애자들은 이성애자라는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서 이성애적 법과 관행들에 도전할 수 있다. 우리들 중 이반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위험하지 않은 수준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이성애주의에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정체성

 

남성, 여성이라는 두 개의 고정된 성정체성을 넘어서는 것은 우리 대다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사적인 일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지배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범주로 간주된다. 사실,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 그리고 남성처럼 행동하는 여성은 동성애 혐오증과 게이 혐오증의 주요 표적이다. 동성애 혐오증과 게이 혐오증은 사람들을 견고한 두 개의 성적 범주 안에 머물도록 위협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철두철미한 여성이거나 철두철미한 남성일까? 그 사이에는 정말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간주되거나 강요될 때, 누가 승리자이고 누가 패배자일까? 이런 구분은 여자 아이에겐 분홍 옷과 인형을 주고, 남자 아이에겐 파란 옷과 트럭을 쥐어 줌으로써 시작된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생식기가 확인되고 발표되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다. 중성으로 태어난 아이(전에는 ‘자웅동체’라 불린, 남성도 여성도 아닌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이 외과적으로(보통 해부학적 여성으로) 변할 때, 어떤 때는 부모 품에 안기기도 전에 시작된다.


성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용어들

아래 용어들은 현재 진화 과정에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용어들이 사용되는 방식이나 의미는 시간이 가면서 변화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   가장 널리 쓰이는 말로, 그 안에 많은 유형의 사람을 포함하는 아주 큼직한 우산 같은 용어다. 몇 가지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젠더의 전형적인 정의를 거부하고 도전하는 사람, 또는 태어나면서 부여된 젠더와 갈등을 빚거나 의문시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트랜스섹슈얼, 드랙킹, 드랙퀸, 이성복장자, 젠더벤더, 간성까지 다 담고 있는 개념이다. ‘트랜스’는 트랜스젠더의 줄임말로, 최근에 많이 쓰이고 있다.

트랜스섹슈얼 자신이 반대의 성이라고 또는 반대의 성이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로, 자신의 생물학적 성이 자신의 신념이나 정신세계와 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들 중 대다수가 성전환 수술을 원한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트랜스섹슈얼(FTM)  여성으로 태어나고 양육되었으나 자신을 남성으로 여기는 사람.남성에서 여성으로 트랜스섹슈얼(MTF)  남성으로 태어나고 양육되었으나 자신을 여성으로 여기는 사람.

젠더벤더 전통적 성별 경계에 도전하거나 경계를 넘나든 사람들. 성별에 대한 판에 박힌 복장, 표현, 성역할의 지배에 반대하는 정치적 표현이다.

드랙킹  에로틱한 성적 즐거움이나 정치적 표현을 위해 남성 복장을 하는 레즈비언 여성들. 자신을 여성이나 중성으로 정의하며, 성전환 수술을 원하지 않는다.

드랙퀸  여성 복장을 하는 게이 남성들. 자신을 남성이나 중성으로 정의하며 성전환 수술을 원하지 않는다.


트랜스섹슈얼 

트랜스섹슈얼은 젠더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대부분은 우리가 자신의 실제 젠더와 맞지 않는 몸을 하고 태어났다고 여긴다. 의학적으로 보면, 우리에게는 ‘성정체성의 혼란’이 있는데, 이때 ‘혼란’은 무언가 잘못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은 의학적인 방법이나 개인적인 해결이다. 성전환 수술과 호르몬 요법을 병행하거나 호르몬 치료만 하거나 자기 안에서 느끼는 성으로 말하고 걷고 드러내는 방법을 열심히 연습하는 것 등이다. 의학은 남성 생식기로 질을 만들고, (지금까지는 성공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여성 생식기로 음경과 음낭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외과 수술은 자신의 몸과 정체성을, 내부와 외부를 일치시키고 싶어 하는 성전환 여성과 남성 수천 명에게 아주 성공적이었다. 많은 성전환자들은 이런 수술을 갈망하지만 모두가 그럴 만한 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 해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트랜스섹슈얼이 의학에 의존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많다. 이 책을 쓰는 우리는 성전환 수술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완벽한 정보와 상담, 치료를 쉽게 받을 수 있어야 하며, 비용이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학적 ‘해결’이 실제로는 정치적 ․ 사회적 편견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의학적 조치를 원하는 트랜스섹슈얼은 사회의 지배 규범에 맞추기 위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몸을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잘못된 몸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것이 항상 정확할까? 우리는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사회를 안심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항상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두 가지 고정된 성별 체계 바깥으로 나간 이들을 벌하지 않는다고 해도 의학적 해결이 반드시 필요할까? 남성으로 보이는 여성이 여자 화장실을 사용하려 할 때 사람들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받지 않는다면, 그녀는 남성으로서 남자 화장실에 ‘무사통과’하기 위해 남성 호르몬 투여하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 아이들이 ‘여성적’으로 행동한다고 비난당하고 내쫓기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모습대로 살기 위해 굳이 의학적 해결 방안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성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꾼 이는 이렇게 말한다.



트랜스젠더

역사적으로, 아주 용감한 영혼들은 성의 경계를 가로질러 왔다.2 오늘날 트랜스섹슈얼이 아닌 많은 ‘젠더벤더’들은경계선을 움직이고 있다. 여성으로 길러진 우리 중 누군가는 남성의 전통적인 옷 입기 방식을 선택할 수 있고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를 수도 있다. 얼굴에 난 솜털을 뽑거나 밀어 버리지 않고 내버려 둘 수도 있다. 여성스럽지 않게 보이는 것에 대해 남들이 조롱하거나 비난하더라도 , 가슴을 천으로 조여서 밋밋하게 할 수도 있고 남성 호르몬을 맞을 수도 있다. 우리 중 누군가는 공적으로는 여성으로 살아도 사적으로는 남자로 살거나, 그 반대로 살 수도 있다. 엄격한 성별 경계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벌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트랜스젠더 활동가이자 드랙킹인 레슬리 페인버그는 『완전한 레즈비언 이야기』라는 소설에서 미국 뉴욕 버팔로에서 주인공이 자라면서 점점 더 남성다워짐에 따라 경찰에게 더 많이 폭행당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 이후 레슬리는 응급실에서 생명이 위험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때, 그가 여성이라는 것을 안 담당의사에게 치료를 거부당한 적이 있다.

   대중은 모든 트랜스젠더들을 레즈비언이나 게이라 생각하면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헷갈려한다. 트랜스섹슈얼을 포함한 트랜스젠더들은 성적 지향이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이성애자일 수도 있고 레즈비언이나 게이일 수도 있고 양성애자일 수도 퀴어일 수도 있다.

젠더, 곧 성이 둘 이상이면 어떨까? 우리 대다수는 성은 두 가지라는 의식이 너무 깊어 남성/여성의 구분을 넘어서는 생각의 전환에 방해가 된다.



우리는 모두 젠더에 대한 생각을 열어 놓음으로써 많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 성을 두 가지로만 고정해 놓은 체계는 레즈비언, 양성애자, 게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위험하게 하는 동성애 혐오적인 편견과 행동을 부른다. 또 성 차별과 남성 우월주의, 여성에 대한 폭력의 기반이 된다. 레슬리 페인버그, 케이트 본스테인, 로렌 캐머론, 미니 브루스 프랫 등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쓴 책을 참고하자.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공포와 여성들의 연대

 

어떤 여성들은, 여성주의자는 곧 레즈비언일 것이라는 식구들과 친구들의 추측 때문에 여성운동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법적 ․ 사회적 인정을 위해 싸우는 일부 레즈비언들은 이성애자거나 양성애자 여성들이 레즈비언보다 ‘덜’ 여성주의적이며, ‘진짜’ 여성주의자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남성들과는 연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극단적인 보수 정치계와 종교계에서는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동성애자거나 양성애자이며 또는 그렇게 되려는 사람들이라고 몰아가거나 남성들을 혐오하는 여성들이라 묘사하며 이런 분열 현상을 이용하려 들기도 한다. 우리를 분열시키고 우리가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드는 도구로 동성애 혐오증을 이용하는 이들은, 모든 사람을 위해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여성운동의 열정과 연대의 힘을 꺾고 있는 것이다.

   트랜스 혐오증(트랜스젠더에 극도의 혐오와 두려움을 보이는 것) 또한 우리를 분열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들은 남성으로 태어난 트랜스섹슈얼 여성들을 두려워하고 신뢰하지 않는다. 남성에서 여성이 된 트랜스섹슈얼들은 여성들만의 모임에서 거부되기도 했는데, 남성으로 지내던 때에 누렸던 특권을 요구할 것이라고 믿는 여성들이나 남성이 저지르는 성폭력이나 여타의 폭력을 당한 경험 때문에 남성을 신뢰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여성들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이들은 여성으로 살기로 결심하면서 남성의 많은 특권들을 버렸음을 생각해서 이들을 환영한다. 따라서 문제는 복잡하고 모든 면을 고려하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남성에서 여성이 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쓰는 우리들은 모든 여성이 안심하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성숙하기를 바란다.



트랜스젠더 여성들과 모든 성적 지향의 여성들이 여성운동 안에서 우정과 성장, 힘을 찾아서 나눌 수 있을 때, 우리 여성은 분명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세력이 되어 사회 변혁을 향해 나갈 것이다.

 

 

3부 건강한 성과 생식결정권


여성이 생식 건강을 지키고, 자녀를 가질 것인지, 가진다면 언제가 좋을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에 중요한 문제다. 우리 삶을 만들어 나가는 데, 우리 성을 표현하고 즐기는 데 모두 중요하다. 3부는 우리 몸을 더 잘 알기 위한 몇 가지 기초 지식에서 출발한다. 우리 몸의 해부학적 구조와 출산 관련 주기, 월경 주기 호르몬, 월경 중에 나타나는 문제를 설명한다. 그리고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있지만 아이를 당장 갖고 싶지는 않은 여성들이 알아 두면 좋을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인 피임과 인공유산을 논의할 것이다. 파트너가 여자든 남자든 활발한 성생활을 하면서 성병과 에이즈를 예방하는 법도 제공한다. 성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불임의 원인이 되기에 임신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성병에 관한 정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또한 예상치 못한 임신을 했을 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함께 고민한다. 마지막으로는 보조 생식술을 소개하면서 첨단 과학 기술이 여성의 몸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으로 알아본다.

   3부에 나오는 여러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는 자아존중감과 자존심을 계발해야 한다. 인생을 계획할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기회도 확보되어야 하고, 질 좋은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하며, 가정생활을 누리고 파트너에게서 존중받아야 한다.

빈곤 여성과 십대 여성, 이주 노동자 여성,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망라한 모든 여성들이 건강한 성생활을 하고, 이와 관련된 결정을 할 때 동등한 기회를 누리려면 우리 사회에서 성 차별, 인종 차별, 경제적 불평등 문제도 해결되어야 한다.


 

임신과 출산의 결정

 

우리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던 시대에 자라났다. 우리 할머니 세대에는 여성의 경제 상황이 어떻든 간에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했다. 피임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으며, 효과도 없었고, 당시 사회가 용인하는 여자들의 삶이란  아이가 생기면 낳는 일이었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머니로 사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피임이 좀 더 수월해졌지만 대다수의 여성들은 여전히 아이 낳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오늘날 부모가 되는 것은 전에 비하면 훨씬 더 선택의 여지가 많아졌다. 피임 보급으로 여성들은 성생활을 즐기면서도 임신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산전 의료 관리 체계나 정자 기증을 비롯한 생식 기술이 향상되어 가임 기간이 사십대 후반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변화는 많은 레즈비언과 독신 여성, 불임 커플이 원하는 때 아이를 임신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출산 조절이 가능해지면서, 부모 되기를 심사숙고할 여유가 생겼다. 자녀를 낳고 기르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여성의 삶에 중요하다. 자녀를 원하는 여성, 원치 않는 여성, 자녀를 갖는 문제를 미뤄둔 여성 등 다양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선택을 여유를 두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에 휘말려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지 모른다. 입양하는 방법이 하나 남아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 임신이 불가능하게 될 수 있으므로 결정에는 시간 제약이 있다.

   엄마가 되면 어떤 느낌일지, 막상 자녀가 태어나면 좋을지, 내가 아기를 대하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독신모든 남성 배우자가 있든, 인생의 어느 시기에 아이를 가졌든, 아이를 낳았든 입양했든 간에 여성들은 서로 어머니 노릇을 지원해 주고 정보를 나눠야 한다. 레즈비언 어머니, 이성애자 어머니,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여성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연령층의 아이들, 외동 아이, 그들의 형제자매들이나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부담감에 대해 물어보고, 자녀를 돌보기 위한 정보를 나눈다. 나이에 따라 일상이 분리되는 사회에서 부모가 되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은 어린이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여성은 아기를 낳으면 키우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안다’고 여겨진다. 어머니가 되니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다른 여성들에게 물어보고, 특히 어머니 역할에 사회가 어떤 지원을 해주는지 상세히 물어보자.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질문해 보자. 나는 왜 자녀를 원하는가? 아기가 태어난다면 어느 시점이 좋을까? 아기와 살면서도 계획한 일들을 계속하려면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일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일과 육아 사이 갈등은? 의료 혜택이나 재정적인 부담은? 육아 휴직 급여나 육아 지원금, 보육료 감면 혜택 등의 정부 보조 프로그램을 알아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제도들은 자주 변하고, 부모 지원을 위한 정부의 복지 정책은 한계가 있다.

   어떤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키울 것인지, 어떤 공동체에서 자라게 해야 하는지, 또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종 차별, 소녀와 소년들의 삶을 다같이 망가뜨리는 성 차별과 동성애 혐오 같은 문제들에 맞설 준비는 되었는지 질문해 봐야 한다.

   배우자가 있을 때 자녀를 갖거나 입양한다면, 헤어졌을 때 혼자서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독신이라면 자녀가 생겼을 때 새로운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내게 부모 역할을 할 만한 정서가 충분한지 판단해야 한다. 지원 체계가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 부모들에게 중요하다. 주변 사람들은, 흔히 겪는 감정적 혼란 속에서 우리가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도와줄 수 있다. 이 모든 질문에 정답은 없지만, 부모 노릇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생각해 두면 아기들이 우리 인생에 미칠 영향을 좀 더 분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부모 되기’에 점차 흥미를 잃고 있으며 모성이 여성에게 본능적 만족을 준다는 문화적 통념에 도전하고 있다. 여성이 자신의 결정을 확신하고 만족해함에도, 사회는 여성들이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만 해도 죄의식을 느끼고 여성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거나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정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설득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어서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하는 여성들도 있다. 불임이거나 유전병이 있는데, 입양을 원치 않는 경우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이들도 있다. 현재 독신인데 아기만큼은 부모가 모두 있는 상태에서 키우고 싶을 수도 있다.



아기를 낳지 않고서도 우리 삶에 아이들을 아우를 수 있다. 어린이들은 많은 곳에서 자기 엄마가 아닌 다른 여성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다. 우리가 평생 아이들과 맺는 관계는 친구나 친척 아이들과 맺는 관계처럼 개인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공식적인 구조와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부모가 되면 엄청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경험하는 인생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배운다. 우리는 아이들과 맺는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관계 속에서 자신에 대해 배운다. 자녀를 키우는 것은 생명의 연속성에 참여하는 방법이며 우리의 영혼과 미래에 이르는 길을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녀 양육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새로운 투자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 갖는 것을 미룬다. 어머니가 되기 전에 자신의 정서를 더 잘 이해하고 싶다거나 일이나 사생활의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자녀를 키우는 대신 공부나 일을 하고 사람을 사귀고 경험을 쌓기 위해서다. 어떤 여성들은 출산을 삼사십대까지 미룬다. 이 나이에는 여성의 가임 능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고 임신이 되는 것도 오래 걸린다. 그러나 영양 상태와 건강이 좋고, 산전 관리를 일찍 시작했다면 늦은 나이에 임신한 여성들도 얼마든지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

   지나치게 어머니에 대한 문화적 정의와 어머니로서의 자신에 대한 기대가 종종 지나치게 이상화돼 아이를 가질 ‘준비’가 안 됐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양육 조건이 완벽할 필요는 없으며 아이들은 융통성이 아주 많다.



파트너와 자녀 양육을 분담하는 여성들에게도, 부모 노릇은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양육과 직장일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어렵고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다.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우리 사회가 부모와 자녀들의 복잡한 욕구에 늘 부응하는 것은 아니다. 자녀를 돌보는 가족의 기능을 실제로 지원하거나 존중해 주지도 않는다. 가족과 직장의 조화가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서 여성주의적 이상에 맞는 가족 정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 정책들은 여성과 아이들의 요구에 최우선적으로 부응해야 한다. 직장 보육 시설 운영 등의 정책은 중소기업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들은 부모가 되더라도 계속 직장일을 할 수 있도록 유급 육아 휴직이 필요하며, 고용상의 불이익 없이 노동 현장에 복귀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영아, 유아, 취학전 아동을 위한 양질의 보육 시설도 제공되어야 한다. 출산과 양육 때문에 휴직했던 이들에게 출산 전과 같은 지위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재교육 프로그램이 제공돼야 하고 자녀가 아플 때를 대비해 부모 휴직제, 시간제 근무, 노동 시간 자율 선택제, 노동 장소 선택제, 노동 시장 공유를 위한 노동 시간 단축제도 필요하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든 아니든, 자녀를 키우는 것은 사회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더 나은 가족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된 사람이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나 서로 협력하고, 자녀 양육은 다음 세대를 위한 사회적 투자라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4부 임신과 출산


 

여성의 삶과 출산의 힘

 

임신과 출산은 숨쉬고 생각하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일이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는 모험처럼 색다른 사건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삶이 모든 면에서 확장된다. 임신, 직장일, 집안일을 함께해 가면서, 또 산고를 치르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창조력과 융통성, 결단력, 직관, 인내심, 유머 감각 등 우리가 지닌 풍부한 잠재력을 발휘한다.

   아이를 둔 여성과 임신한 여성은 모두 저마다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직접 아이를 낳은 어머니도 있고, 수양어머니나 의붓어머니도 있고, 아이들의 후견인도 있다. 우리는 성적인 기호도 다르며 나이도 제각각이다. 파트너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고, 독신일 수도 있다. 장애가 있을 수도 있고, 소득 수준이나 사는 지역도 다르다. 직장인일 수도 있고, 학생이거나 전업 주부일 수 있다. 계획을 세워 임신한 이도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임신한 이도 있다. 임신을 해서도 산전 관리를 잘 받는 이도 있지만 여건이 그렇지 못한 이도 있다. 아예 산전 관리를 생각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도 있다. 출산하는 곳도 다르다. 따뜻한 지지 속에 환영받으며 아기를 맞이하는 여성도 있으나, 홀로 아이를 맞이하는 여성도 있다. 아이를 집에서 낳는 이들도 있고, 조산원이나 병원에서 낳는 이들도 있다. 어떤 여성이든, 어떻게 어머니가 되었든, 자신과 아기를 돌볼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 가정과 이웃, 사회에서도 환영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임신한 이에게는 가족과 친구들의 격려, 사랑, 지지가 필요하고, 경제적 안정, 안전한 일터와 집안 환경, 수준 높은 보육 시설과 교통편 같은 사회 여건, 출산 휴가, 영양가 있는 음식, 잘 쉬고 운동할 수 있는 시간, 노련하고 지혜로우며 산모를 존중해 주는 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임신 기간에 줄곧 누군가의 보살핌과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며, 나와 아기를 세심하게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분만 장소는 가능한 한 집과 가까운 곳이어야 하고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그래야 분만 과정 동안 자기 뜻대로 분만을 할 수 있다. 힘을 낼 수 있는 영양가 있는 음식과 음료도 필요하다. 나를 믿어 주고 인내하면서 자연스러운 분만 과정을 지켜보면서, 옆에서 긴장을 풀어 주고 편안한 분만 자세를 유지하도록 도와줄 사람도 필요하다. 그리고 비상 시에는 병원에 가거나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출산 뒤에는 아기와 함께 보낼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출산하고 난 뒤 며칠에서 몇 주간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산후에는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고 편히 쉬며 운동을 해야 한다. 첫아이를 낳고서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은 여성은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는 물론, 지혜로운 다른 부모들의 격려와 도움을 받고 싶어 할 것이다. 또 다음 임신을 계획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가족계획 기관을 이용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좀 더 인간다운 사회에서는 여성이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출산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성, 아기, 가족을 중심에 두고 조산사가 분만을 돕는 체계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책 결정자들과 돌봄이들은 여성의 언어, 문화, 경험, 여성의 힘을 소중하게 여기며 우리를 존중할 것이다. 사회 경제적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여성에게 힘과 자신감을 줄 것이고 무지를 없애 주고 두려움을 최대한 없애줄 것이다. 또한 자원 할당은 균등하게 하며, 먹을거리와 주택을 넉넉하게 공급할 것이다. 대부분의 분만에는 조산사들이 참여할 것이고, 의사들은 적절한 조언과 의료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집이나 조산원, 병원  등 어디든 원하는 곳, 즉 기술을 믿을 수 있고 인정 많은 조력자가 있는 곳을 골라서 분만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 보험의 실질적인 혜택을 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정책적으로 가족 휴가가 넉넉하고, 주간 보육 시설이 있어 직장을 잃을 염려 없이 아기와 가족들은 안심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의료비는 급감하고, 여성들은 자부심을 가지며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분만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도 잘 자랄 것이다.

   이런 비전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불안한 출산 문화’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런 문화가 우리의 믿음, 기대, 경험을 결정하고 있다. 지금의 산과 체계는 대규모 의료 산업 결합체의 한 부분이다. 의과대학에서는 위험과 질병에 초점을 맞추어 산과학을 가르친다. 그래서 출산은, 병원에서 엄청나게 많은 검사와 의약품, 기술을 동원하여 ‘관리해야만 하는’ 위험하고 견디기 힘든 과정이 되어 버린다. 어떤 검사나 의료 기술도 안전하고 유익하다고 판명난 적 없지만 말이다. 산부인과 의사와 병원 관계자들은 의약품과 기계를 구입함으로써 이미 충분히 부유하고 힘깨나 쓰는 의료기 회사나 제약 회사들을 끝없이 먹여 살린다. 공장을 본뜬 병원 제도는 자기들만의 규율과 시간표가 있어 출산하는 여성의 고유한 리듬을 방해한다. ‘시간을 아낀다.’는 미명 아래 출산 과정에 끼어들지만 실상은 간호사 인력을 대신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 체계에 순응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 사이의 중간 지대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런 체계가 계속되면 임신과 출산, 모성이 가진 성적, 사회적, 영적 차원은 무시되며 억압받거나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 삶의 현실적 조건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의학적이기만 한 산과학은 사회적, 경제적 병폐 때문에 생기는 문제에도 의료적인 해결책만을 적용한다. 돈이 없어서 건강한 임신을 돕는 지원마저 부족한 여성들은 가난으로 인해 이미 전반적인 건강에 문제를 안고 있다. 의료인들은 가끔 임신한 여성을 다정다감한 어머니라기보다는 아기를 담은 용기쯤으로 보고 아기에게 ‘적대적인 환경’으로 취급하면서 태어날 아기와 우리를 맞서게 한다. 임신 기간 중 대학 병원에 가면 우리는 의대생들을 위한 실습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우리는 연속성 없고 서둘러 대는 진찰을 받고 존중과는 거리가 먼 대접을 받는다. 병원에 가 보면 우리는 고립되어 버리고, 불친절과 모욕을 너무 많이 당하지만 그렇다고 산전 진찰을 중도에서 그만두자니 임신부 건강이 위험해질 수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끝까지 모르고 지낼 위험도 있다. 그러다 마침내 분만이라는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산과 의사와 소아과 의사는 비싼 기술로 아기를 ‘구출’해 낸다. 아기를 집으로 데리고 온 뒤에는 그 작은 아기를 보살피는 데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

   현재 조산사, 가정 분만 같은 대안을 선택하는 이들은 아주 소수다. 병원 분만의 대안인 조산술이 대부분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더 좋고 더 안전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세계 곳곳에서 과학 논문과 일반서에(심지어 의학서에도) 넘쳐나는데도 대부분 의사들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성 중심의 출산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과 조산사의 열정적인 노력의 결과로, 좀 더 산모와 가족 중심의 분만을 하고 분만에서 산후 과정까지 확대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병원이 늘고 있다. 일부 의식 있는 의사는 조산사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새로운 치료 모델 개발에 열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병원 정책을 좌우하는 것은 여성의 필요가 아니라 건강관리 체제에 의한 예산의 우선순위인 경우가 허다하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병원들은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고가의 마케팅 캠페인을 하고 고객을 놓고 서로 경쟁한다. 그만큼 분만은 큰 사업이다. 상당수의 여성과 그 가족들에게, 어떤 병원에서 분만한다는 것은 그 병원의 다양한 서비스 체계로 첫 발을 내디디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이 많은 분만실 대신 가족 중심의 분만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면 모든 여성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외양적 변화와 진정한 변화는 구별해야 한다. 대학 병원과 진료소에서도 산모에 대한 배려보다는 의대생과 레지던트 훈련이 더 우선시된다. 분만 시간을 정해 두기, 그 시간을 넘기면 부적절하게 개입하기, 분만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인식 따위가 지배적이다. 이른바 ‘정상 표준 분만’에도 다양하고 광범위한 개입을 한다.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정상’ 기준에 어긋날수록 그 과정을 교정하기 위해 더 많이 개입한다. 산과의 개입 관행에 대해 질문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하는 ‘까다로운’ 여성들은 ‘다루기 힘든’ 부류로 분류되어 가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병원에서 일하는 조산사는 일자리를 잃거나 거부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정상’ 분만에 대한 과도하게 제한된 프로토콜(환자 치료를 실행하기 위한 계획서)을 만족시켜야 한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자치 조산사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 좀 더 많은 이들이 자연적인 출산 과정이 창조적이고 힘을 북돋우는 사건임을 경험했다. 그러나 여성이 원하는 바를 의료진에 알려서 바라는 대로 분만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은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순진하게도 산과 교육, 시술, 철학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산과학은 여전히 의사들을 편협하게 교육하고 수련하면서 의료 권력과 기술을 방어해 왔다. 어떤 사람은 분만 절차를 의사와 산모 양쪽이 모두 학습하는 의례와 같다고 표현했는데 그것이 자연스런 출산 과정을 통제하고 왜곡한다.



다른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분만하는 것을 볼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우리는 분만이라는 행위와 고통을 두려워하게 된다. 돌보는 자들이 ‘조정하는’ 자가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도 속에 밀어 넣는다. 의학 용어 자체도 자신감을 잃게 만들고 힘을 꺾는다. ‘진척 실패’, ‘부적절한 골반’, ‘기능이 미미한 경부’ 같은 식으로. 당사자인 우리는 환자라고 표현되고, 의사는 분만을 조절하고 고위험 임신을 모니터하고 아기를 받는 자로 표현한다.

   실험과 기술들은 점차 늘어나는데, 그런 것들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표준이 될 뿐, 그 이점과 위험이 무엇인지 증명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보를 얻고 관리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서, 또는 지식을 추구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의료 기술이 건강한 임신과 완벽한 아기를 보장할 거라고 믿어 버린다. 때때로 운이 좋으면, 걱정을 덜고 자신감을 높여 줄 검사만 받고 다른 검사는 피해갈 수 있다. 그러나 예방할 수 있는 것이 뭔가 잘못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병원에서 받게 하는 검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잘못된 행동이라고 느낄 수 있다. “아기가 염려되지 않나요?” 이 한마디는 우리를 무조건 항복하게 만든다. 우리는 건강한 내 몸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에 의심을 품는 의료 과정에 동의한다.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병원에 가면 기가 죽는 것 같아요. 무슨 검사를 받을지 결정하느라 힘이 다 빠졌어요. 임신했다는 사실을 즐길 수도 없고 몸의 변화를 소중하게 여길 수도 없었어요.”  

  『우리 몸 우리 자신』 저자들은, 진정한 자연 분만에 관한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임신, 진통, 출산을 자연스레 흘러가는 유기적인 사건으로 서술하려 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여성의 조산과 출산에 대한 지혜와 지식을 보존할 것이다. 또한 과학 기술 밑바탕에 깔린 편견에 반대하며, 여성들이 어디서 출산하든 여성의 경험을 풍성하게 하는 지식을 늘리기를 바란다. 4부에서 우리는 여성의 출산 과정을 가장 긍정적이고 기쁘고 존경스러운 방식으로 돕는 전통 조산사의 신념과 기술을 생생히 전달하고 지키려고 한다.



우리는 사회, 경제 정의를 위해 노력하고 싸우면서 지역 사회 보건의 핵심 모델을 만들어 간다.

   미국 뉴욕의 브롱스에 있는 「모리스하이츠출산센터」는 여성들이 자원과 교육, 정책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보여 주는 한 예다. 이 센터는 십대들에게 4개월간 양육 교육을 하여 자신감과 능력을 갖추도록 돕는다. 또, 조산사들은 노년 여성들에게 늦은 아침에 ‘할머니 밥상’을 대접하면서 최고의 조산술 전통을 의료적 치료와 결합한, 자신들의 시술법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 지역 여성들은 출산 센터의 운영 과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할 수 있다.



출산 문화를 다시 만들려는 운동, 우리 몸과 영혼을 점령하려는 의료 행위에 도전장을 내미는 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와 함께해 보자. 정의로운 사회라면 높은 수준의 모성 보호는 기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임신과 출산, 모성을 자연스럽고 즐거운, 힘이 되는 인생사로 환영하고 우리 아이들을 이 세상에 데려다 준 모든 어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